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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수필모음 / / 2019. 11. 1. 20:30

책이라는 너

 

 

고백하건데 난 위선자다.

 

 

요새 책을 많이 안 읽어서 슬프다고 주위에 말하고 다니지만, 손에서 스마트폰을 떼지 못한다.

오늘은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 정보 습득하니까 괜찮아라고 하며 유튜브에 들어간다. 

내 컴퓨터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책들은 

"언제 날 읽어줄 건데 바보 멍청이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미안해. 사실 표지만 보고 샀어. 아. 알라딘 굿즈 때문에 사기도 했지 참. 

한국에 평범한 쓴도쿠 중 한 명으로서 매달 안 읽은 책이 쌓여간다. 

 

 

그럼에도 주위 사람들은 날 책에 미친 사람으로 생각한다.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언제 책이랑 헤어지고 연애할래?"라는 심심찮게 들을 정도니. 

그들이 생각하는 내 이미지는 일어나면 책 읽고, 이동하면서도 읽고, 밥 먹으면서도 읽고, 독서하느라 친구도 만나지 않는 그런 사람인가 보다. 

맞다. 그럴 때가 있긴 했다. 

 

 

 


 

1년 전 취준과 사랑 때문에 고통받던 내가 우연찮게도 책과의 깊은 로맨스를 겪게 되었다.  

처음 손에 든 책 '살인자의 기억법'을 하루 만에 다 읽고 1년간을 그렇게 보냈다. 

하루에 1권 내가 정한 독서 루틴에 따라 1년을 그렇게 보냈다. 

거창한 목표를 가지지도 않았고, 그냥 하고 싶어서 했다. 

아마 도피였는지도 모른다. 취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잠시 활자의 세계로 도망간 거 같다. 

 

 

당장 스펙을 쌓아도 모자랄 판에 1년간 책을 읽는다고 말하니, 부모님은 어안이 벙벙했다. 

정신 차리라는 어머니의 말이 2시간 동안 귀에 박혔지만, 무슨 용기로 괜찮다고 대답한 건지

좋은 직장에 들어간 형은 날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예상대로 명절에 내려가자마자 가족 간의 설전이 벌어졌다. 

 

 

친구들도 하나같이 이상한 눈초리로 날 보았다. 

적지 않은 26살의 나이를 책만 읽고 보낸다니, 청년실업률이 끔찍할 정도인 헬조선에서 무슨 생각으로 이 청년은 이러는 걸까? 하는 표정들로 날 보았지.

스펙도 좋지 않고, 돈도 많지 않은 나는 그렇게 책에 미쳤다. 

 

 


 

책과 보낸 1년은 연애랑 마찬가지 었다. 처음 몇 달은 정말 불타올랐다. 

매일 새로운 지식이 머리에 들어오니 지루하지도 않았고, 종이질감에 흥분(?)을 느끼는 나는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한 권을 하루 만에 다 읽고 나면 어찌나 뿌듯하던지, 침대에 누워 자기 전 지금이라면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매일 들었다. 

 

 

온갖 책을 읽었다.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예술, 문학 등 사실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고 보면 무방하다. 

속독을 한건 아니다. 난 평균적으로 1시간에 60쪽 밖에 읽지 못한다. 300페이지 기준으로는 5시간이 걸렸고, 500쪽이면 9시간 정도가 걸렸다. 

매일 두꺼운 책을 읽지도 않았다. 기분이나 그날 일정에 따라 300페이지 교양서를 읽기도 했고 600쪽짜리 책을 읽기도 했다. 

 

 

1년간을 그렇게 보냈다. 예상했다시피 많이 놀러 다니지는 못했다. 그 당시 나에게 노는 건 독서토론이나 자율공부 스터디에 가서 책을 읽는 거였다. 

개별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도 별로 없었고, 책 읽기에 바빠 약속을 미룬 것도 수십 건이다. 

2018년 10월에는 조카가 태어났지만, 책 읽는다고 바빠 19년 추석에야 처음으로 조카를 만났다. 

이걸 아는 사람들은 아직도 내 머리에는 책밖에 없는 줄 안다. 

 

 


 

목표했던 365권의 독서가 끝나고, 힘들게 레이스를 완주하고 나니 날 기다린 건 포상이 아닌 독감이었다. 

2019년의 신년은 독감에 골골되면서 자취방에서 보냈고, 그 뒤로 1일 1독도 끝이었다. 

 

 

고백하자면 지금은 일주일에 1권을 겨우 읽을 정도다(이것도 독서 스터디 때문에 읽는 거니) 

취업준비에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곁에 두지 않지만, 스마트폰의 유튜브 기록을 보면 염라대왕이 "이놈!" 하면서 망치를 때리리라.

 

 

책에 대한 연민이 아직까지 남아있어 이것저것 구매한다. 

언젠가는 읽겠지 하면서 쌓아놓은 책들을 보면 흐뭇하면서도 죄책감이 든다. 그래도 버릴 수 없다. 

내 곁에 남아있는 책의 흔적을 놓아주지 못해서, 같은 아날로그인 내가 인연을 잡아두려 한다. 

 

 

언젠가는 읽겠지 그래. 위선자는 오늘도 책을 구매하고 쌓아둔 채 스마트폰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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