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사철 푸르름을 꼿꼿이 유지하고 있는 저 소나무의 위용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쪽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막막한 기분이 들기도 하다. 저 보잘것없는 나무 한 그루조차도 본인의 모습을 끝까지 잃지 않는데, 우리는 왜 이리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타인한테 가면을 들이미는 걸까? 우리는 왜 귀소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대할 수 없는 걸까?
우리의 모습은 영화 ‘트랜스포머’에 나오는 변신 합체 로봇과 같다. 진짜 본질은 하나인데 남을 대할 때 진정한 자아를 감추고 겉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모습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나무로 비유해서 말해보자면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내가 일컫기에는 가변목(可變木) 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사시사철 다른 색과 모양의 꽃잎을 보면 사람들은 참으로 예뻐하고 좋아할 수도 있겠다. 거기다 힘을 쏟는 나무의 입장은 어떨까? 다른 종의 나무들과 번식을 위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주위 새들의 시선을 끌고 현혹할 수 있는 색깔의 꽃잎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들은 나무에 있어서 스트레스로 여겨질 수 있다. 남들한테는 그 꾸며진 모습이 좋아 보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한테는 피폐함 밖에 남지 않게 되는 셈이다. 꾸며지는 자신은 오래 가지 않아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남을 대할 때 매번 자신을 창조하자니, 주위에서 보이게 되는 인격도 여러 개고 정작 자신도 진정한 자신을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런 현상을 보고 마치 가면을 쓰고 자신을 억누르는 것 같다고 하는 의미로 가면 증후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현대사회에서 가면 증후군으로 마음고생 하는 사람들은 현실과 자아의 차이가 너무나도 커 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다. 나의 자아 속에 각기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산재해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머리가 아프고 복잡할까? 인간만이 가지는 스트레스지만, 정작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인간에게도 단순함이 필요한 셈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복잡성을 기본원리로 구성된 집단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접근하기가 쉬워 보이지만 쉽지가 않다. 취업할 때 자신이 살아왔던 본 모습을 속이고 자소설(자기 소개소설)을 써내려가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롭게 느껴지지는 않는가. 가까운 이웃의 모습일 수도 있고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현실이기도 하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감정을 속이고 오늘도 여러 개의 가면을 휴대해 가면서 산다. 언제 부서지고 조각날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파편화된 자아를 억지로 붙들어 매고 사회라는 전쟁터에 나가 있는 셈이다. 그런 인간들의 행동을 보고 몰래 비웃는 소나무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만 같다. 인간은 단순하게 살 필요가 있다.